[역사속의 오늘-11월15일] 청의 실권자 '서태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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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1월15일] 청의 실권자 '서태후' 사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19.11.15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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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908년 11월 15일은 50여 년 간 청나라의 실권자로 군림했던 중국의 서태후가 사망한 날이다. 17세에 함풍제의 궁녀로 뽑힌 그녀는 아름다운 용모로 황제에게 관심을 끌었고 의비로 책봉됐다. 1856년 서태후가 아들(훗날의 동치제)을 낳자, 함풍제는 크게 기뻐하며 서태후를 의귀비로 책봉했다.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서태후는 함풍제, 황후 뇨후루씨와 함께 열하로 피난을 갔다. 함풍제가 사망하고 동치제가 즉위하자 서태후는 자의단우황태후라는 칭호를 받고 섭정에 나섰다. 이후에도 광서제,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를 황위에 올리는 등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여인이 정사에 관여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 양무 운동과 변법자강 운동

효흠현황후
서태후

서태후가 권력을 잡았을 무렵 청나라는 외세의 압력과 봉건 질서의 붕괴로 근대화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기였다. 증국번, 이홍장 등 한인 출신 관료들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정신이 함양된 양무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꾀하려 하였고 서태후를 비롯한 만주족 지배층 또한 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청일 전쟁의 패배 등으로 인해 양무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주도 세력들도 몰락했다. 한편 친정을 시작한 광서제는 1889년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에 관심을 보였고, 서태후에게 좌지우지되는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캉유웨이의 정책을 지지하게 되었다. 1898년 광서제는 '명정국시'(明定國是)라는 조서를 내려 캉유웨이의 개혁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무술변법). 서태후도 초반에는 변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광서제의 목적이 권력을 이양시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고 변법을 지지하는 유신파를 제거하려 했다. 유신파의 핵심이었던 담사동은 위안 스카이(원세개)에게 서태후를 감금하라고 부탁했고, 상황이 유신파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위안 스카이는 이 사실을 서태후의 심복 영록에게 고했다. 서태후는 자금성으로 돌아와 무술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유폐시켰고, 황제의 병을 이유로 다시 섭정이 되었으며, 진비는 매관매직을 했다는 이유로 북삼소에 가두었다. 또한 담사동과 양예를 비롯한 유신파의 핵심 인물들을 죽이고 변법 조치들도 취소했다.

▲ 의화단의 난

서태후는 광서제 대신 단친왕(端親王) 재의의 아들 부준(溥儁)을 즉위시키려 했으나 서양 열강은 광서제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각국 공사들은 광서제를 진찰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광서제를 진찰한 프랑스 의사는 "황제의 맥박이 정상이며,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발표하여 서태후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열강의 공사들은 부준의 대아가(大阿哥; 황태자) 책봉에도 축하하러 오지 않았다. 서태후와 단친왕은 본래 반청 단체였던 의화단을 구슬려 열강 8국(러시아, 일본,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과 대항하도록 하였다. 의화단에 의해 각국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8개국 연합군은 북경을 함락시켰고, 원명원은 불에 탔으며, 서태후는 광서제와 함께 서안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 과정에서 서태후는 진비를 우물에 빠뜨려 살해했다. 서태후와 광서제는 평복 차림으로 피난을 갔고 먹을 것과 물을 찾지 못해 이틀이나 굶기도 했다. 피난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서태후는 북경에 남아있던 경친왕 혁광 등에게 자신의 안전만 보장되면 열강의 어떠한 요구도 받아들이라고 지시했고 이로 인해 1901년 불평등 조약인 신축조약이 체결되었다. 북경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오만하고 보수적이었던 태도를 버리고, 연회를 열고 공사 부인들을 초대하여 대접하는 한편 그때까지 했던 것 이상으로 사치를 일삼았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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