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1월12일]중국 국부 '쑨원' 태어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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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1월12일]중국 국부 '쑨원' 태어난 날
  • 김철한 기자
  • 승인 2019.11.1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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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 기자] 쑨원은 청일 전쟁에서의 패배로 청 조정이 무능을 드러냄에 따라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모색, 중국을 새롭게 일으키려한 인물이다.

삼민주의로 대표되는 중국의 공화제를 창시한 쑨원은 중국의 국부(國父)로 불리운다.

쑨원
쑨원

1866년 광둥성 샹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쑨원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나 열네 살 때 하와이로 건너가 호놀룰루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체험했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후 청 조정이 무능함을 드러내고 서구 열강들의 침탈이 가속화되자, 쑨원은 나라를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호놀룰루에서 쑨원은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기치로 하는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했고, 1895년 10월 광저우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부하의 밀고로 무산되고 쑨원은 해외 망명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먼저 일본으로 탈출해 하와이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갔으나 1896년에 런던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의학교 시절 스승의 도움으로 무사히 풀려난 후 189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과정에서 쑨원은 세력을 모아 1900년에 다시 제2차 무장 봉기를 계획했지만, 이 역시 실패하고 다시 외국으로 나가야 했다.

이후 쑨원이 일본, 하와이, 베트남, 미국 등에서 중국인들에게 혁명 사상을 전파하던 중 1905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 그해 8월 도쿄에서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했다.

쑨원은 동맹회 민보 발간사를 통해 그동안 구상했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발표했다.

1911년 쑨원은 난징에서 신해혁명을 성공시키면서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다.

그러나 북양군벌의 거두 원세개와 타협, 같은 해 3월 원세개에게 실권을 위임, 원세개에게 대총통직을 넘겨주었다.

쑨원은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 대원수에 취임하고, 1919년 중화혁명당을 개조, 중국 국민당을 결성했다.

1924년 국민당대회에서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3대 정책을 채택한 쑨원은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시킨 뒤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국민혁명'을 제창, 국민회의를 주장했으나, 이듬해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삼민주의

쑨원에 의해 제창된 지도이론으로 중국 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96년~1897년 쑨원이 영국 런던에서 망명중에 구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멸만흥한'(滅滿興漢: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킨다)에 입각한 민족주의, 수천년간 이어진 군주전제 정치체제의 변혁을 목표로 한 민권주의, 사회·경제의 조직 개혁을 지향하는 민생주의를 골간으로 하는 혁명 이론이다.

※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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