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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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8월 22일
  • 여운균 기자
  • 승인 2019.08.2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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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8월 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34번째 날이다.

[사 건]

1485년 - 영국 장미전쟁 종전과 헨리 7세 국왕 즉위

1864년 - 제네바 협약 체결로 국제 적십자회 탄생

적십자회 창시자 앙리 뒤낭
적십자회 창시자 앙리 뒤낭

적십자회는 전쟁, 자연 재해 등에서의 희생자들과 기아 선상의 난민들을 돌보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인도주의 단체이다. 중립·평등·독립·자발적 섬김·일관성과 보편성의 실천을 원칙으로 현재 적십자는 전 세계 146개국이 가입되어 있고 15개의 나라에선 유사한 단체가 활동한다. 회원 수는 2만 5천명으로 대부분 25세 미만의 청년이다. 적십자에 붉은 십자가는 전쟁 시에 구호 활동을 위한 차량이나 시설이 공격받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 앙리 뒤낭에 위해 창시 됐다. 1858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목격하고 여러 나라에 인도주의 단체의 결성을 제창해 1864년 제네바 협약 이후 국제 적십자 운동이 시작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적십자사는 인류의 복지에 많은 공헌을 했다.

1990년 - 한국과 니카라과 수교

1991년 - 한국과 알바니아 수교

2000년 - 북한과 일본 제10차 국교정상회담

[문 화]

1937년 - 일제 서울 전역에 등화관제 실시

1946년 -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 공포

국립 서울대학교 정문
국립 서울대학교 정문

서울대학교(Seoul National University)는 대한민국의 국립대학으로 경성제국대학을 포함한 여러 관·공·사립 전문학교를 통합하면서 국립 종합 대학인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됐다. 1948년 ‘서울대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2011년에는 국립대학법인으로 전환됐다. 법인화 후 설립된 법인의 이름은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이다. 1946년에 개교할 당시에는 9개 단과대학(문리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예술대학, 치과대학)과 한 개 대학원으로 출발했으나 그 이후 점차 학부와 대학원의 규모가 늘었다. 캠퍼스도 옛 경성대학의 동숭동 캠퍼스(현 마로니에공원 자리)를 주 캠퍼스로 활용하고, 그 외에 연건동(현 서울대학교병원과 의과대학 자리), 공릉동(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자리), 을지로, 소공동, 남산동, 그리고 수원 등지에 단과대학들이 있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관악구 대학동, 종로구 연건동, 강원도 평창군에 캠퍼스가 있고 16개 단과대학 83개 학과(부), 1개 자유전공학부, 1개 일반대학원 석사과정 5계열 73학과(부) 30개 협동과정, 박사과정 5계열 75학과(부) 30개 협동과정, 10개의 전문대학원 12개 학과(부)로 구성돼 있다.

1968년 - 교황 바오로 6세 콜롬비아 방문

2006년 - 무궁화 5호 발사

[인 물]

1485년 - 영국 리처드 3세 국왕 사망

1818년 - 독일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 출생

1922년 - 아일랜드 정치가 마이클 콜린스 사망

1933년 - 독립운동가 남자현 사망

독립운동가 남자현
독립운동가 남자현

남자현(1872년 12월7일~1933년 8월22일)은 아버지 남정한과 어머니 진성 이씨(이원준의 딸) 사이에서 1남 3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양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부친이 일찍부터 글을 가르쳤는데 7세에 한글을 8세에 한문을 터득하고 12세에 소학과 대학을 읽었다. 14세에는 사서를 독파하고 한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가 되던 1891년 무렵 김영주(金永周)와 혼인했다. 그의 남편은 1895년 을미사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사망했다. 남편 사후 양군 수비면 계동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1896년 12월 6일 3대 독자인 유복자 김성삼를 낳아 기르면서 평범하게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1907년 열사의 선친 ‘남정한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자택을 임시 의병장소로 삼고 활약할 때 그녀는 장정소집과 정보수집 책임을 지고 적의 후방교란 등 여성의 입장으로는 대담무쌍한 활약을 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김동삼의 서로군정서에 가입해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옥바라지 등으로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모’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편강렬, 양기탁, 손일민 등이 만주 지역 무장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할 때 참가했으며 무장 투쟁이나 테러 위주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참여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에 참여와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크게 공헌했다. 1928년 만주 길림에서 김동삼, 안창호 등 47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지성으로 간호하며 석방 운동에 힘써 보석으로 풀려나게 했다. 1932년 만주국 수립으로 영국인 리튼이 이끄는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손가락을 잘라 흰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낸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일본대사 무토노부요시를 죽이기로 하고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 노파 차림으로 하얼빈 교외 정양가를 지나갔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로 2월 27일,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6개월동안 갖은 혹형을 받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 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62년 3월 1일에 정부는 독립유공자 58명에게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했는데, 남자현은 이봉창, 신채호 등과 함께 최고의 훈장을 받았다. 그녀는 ‘여자 안중근’이라고 불렸다. 2015년 영화 암살의 주인공인 안옥윤(배우 전지현)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1934년 - 미국 장군 노먼 슈워츠코프 출생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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