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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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7월 22일
  • 장석호 인턴기자
  • 승인 2019.07.2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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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장석호 인턴기자] 7월2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03번째에 해당한다.

[사건]

2009년 - 미디어법, 직권상정.

방송법(放送法)은 방송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고 방송의 공적 책임을 높임으로써 시청자의 권익보호와 민주적 여론형성 및 국민문화의 향상을 도모하고 방송의 발전과 공공복리의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이다.(제1조) 현행 방송법은 과거 동일한 명칭의 법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다른 방송 관련 법령과의 관계에서 기본법적 지위를 갖고 있으며, 2000년 당시 4개의 방송 관련 법률을 통폐합하여 개정됐기 때문에 흔히 "통합방송법"으로도 불린다.

2009년 - 21세기 최대 부분일식 관측

1999년 8월 프랑스에서 찍은 일식 모습

일식은 달이 태양의 전부 또는 일부를 가리는 천문현상을 말한다. 지구 표면에서 볼 때의 태양과 달의 시직경이 비슷하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궤도면(황도)과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궤도면(백도)이 거의 일치하여 달이 지구 주위를 돌면서 태양의 앞쪽으로 지나 태양을 가리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 때를 일식이라고 한다. 태양이 달에 완전히 가리면 개기일식(皆旣日蝕), 일부만을 가리면 부분일식(部分日蝕), 해와 달이 겹쳐졌으나 달이 해를 전부 가리지 못해서 반지 모양으로 가려지면 금환식(金環蝕) 또는 금환일식이라 한다.

일식 때 태양을 직접 바라보는 것은 눈에 영구적인 손상을 줄 수 있으므로, 일식 관측에는 특별한 보호 장비(태양 안경 등)나 간접적으로 관측하는 기술이 사용된다.

개기일식에서 완전히 가려진 태양만을 보는 것은 기술적으로는 안전하지만,

일식의 궤도<br>
일식의 궤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식의 상태를 식별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에 위험이 있다. 고정된 장소에서 그러한 상태는 2시간여의 총 시간 동안 최고 7.5분 동안만 지속된다. 먼 곳까지 예상된 일식을 관측하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들에는 '일식 추적자'(eclipse chasers) 또는 '반그림자 애호가'(umbraphiles)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문화]

1927년 - 이탈리아 축구 클럽 AS 로마 창단

[인물]

1887년 - 독일 물리학자 구스타프 헤르츠 출생

1832년 - 프랑스 제1제정 마지막 황제 나폴레옹 2세 사망

프랑스황제 나폴레옹2세

나폴레옹 2세(1811년 3월 20일 ~ 1832년 7월 22일)는 프랑스 제1제정의 마지막 황제(재위 1815년 6월 22일 ~ 1815년 7월 7일)이다. 나폴레옹 1세의 유일한 적자이며,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의 소생이다. 본명은 나폴레오네 프란체스코 주세페 카를로 부오나파르테이다.

1811년 3월 20일에 파리의 튈르리 궁전에서 태어났다. 당시 나폴레옹 1세에게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으나, 모두 애인들에게서 난 서자였고, 정비였던 조제핀 황후와의 사이에서도 아이가 없자, 1810년에 나폴레옹은 그녀와 이혼하고,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마리아 루이사와 재혼하여 나폴레옹 샤를을 얻게 된다. 태어나자마자 황태자의 작위인 로마왕에 책봉되고, 나폴레옹은 그의 곁을 거의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켰다고 한다.

1815년 2월, 나폴레옹 1세가 엘바를 탈출하고 황제에 복위하자, 나폴레옹은 마리아 루이사와 샤를을 데려오길 원했으나, 마리아 루이사는 오스트리아의 장군인 나이페르크 백작과 불륜 관계에 있어 프랑스로 돌아가길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어린 나폴레옹 샤를은 어머니를 거의 보지 못하게 된다. 4개월 뒤에 나폴레옹 1세가 워털루 전투에서 지고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귀양가자, 6월 22일에 칙명을 내려 로마왕인 나폴레옹 샤를을 나폴레옹 2세로 선포하고 제위를 승계받게 하도록 하였으나 7월 7일에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하고 부르봉 왕가에 루이 18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불과 15일의 재위기간은 나폴레옹 2세가 제대로 프랑스에서 황위에 앉아보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1818년 외조부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 2세에게 라이히슈타트(Reichstaht) 공작의 작위를 내리고, 그의 이름 중 나폴레옹을 빼고 대신 '프란츠'(Franz)를 집어넣었다. 1821년 5월 5일, 나폴레옹 1세가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나폴레옹 2세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 나폴레옹 2세는 점점 자랄수록 아버지를 닮아, 명석하였고 잘생긴 외모를 지녔다고 한다. 매우 영리한 그는 프란츠 2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메테르니히는 그에게 프랑스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독일어만 쓰게 강조하여 감수성이 예민한 그에게 우울증이란 지병을 만들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2세는 끊임없이 조국인 프랑스와 아버지를 탐구하였다.

1828년, 나폴레옹 2세는 티롤 연대의 대위로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같이 천재적 군사 전략가는 아니었다. 1830년에 7월 혁명으로 프랑스가 샤를 10세를 폐위시키자, 후임자로 과거의 영광을 이끈 나폴레옹 황제의 아들인 로마왕 나폴레옹 2세를 모시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나폴레옹 2세를 오스트리아의 대공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성사되지 못했다.

1832년 7월 22일, 나폴레옹 2세는 오한과 고질적인 폐렴에 시달리다가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가 지켜보지 못한 채, 2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비록 죽어서이지만 이들 부자의 상봉은 훗날 2차대전때 파리를 점령한 히틀러에 의해 이루어졌다. 젊은 시절부터 나폴레옹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히틀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용 묘지에 있던 나폴레옹 2세의 유해를 파리로 가져와 나폴레옹 1세의 무덤 옆에 이장해 주었다.

그는 생전에 프란츠 카를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의 아내였던, 조피 프레데리케 폰 바이에른 왕녀와 친하였다고 한다. 그와 조피 대공비가 자주 만났을 때, 조피 대공비가 임신을 하여서, 훗날 멕시코 황제가 되는 막시밀리아노 1세가 그와 조피 대공비의 아들이었다는 소문도 있으나, 밝혀진 바가 없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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